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정희/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 (문단 편집) === [[김종필]] === || [[파일: external/image.chosun.com/2015012303306_1.jpg|width=100%]] || [[김종필]]은 [[육군사관학교]]에 8기로 입교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보병]] [[소위]]로 임관해 [[대한민국 육군본부]]로 배속되어 정보국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육군본부 정보국 상황실장 박정희와 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 박정희는 육사 2기로 임관하여 현역 [[소령]]으로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과장으로 재직 중 [[남조선로동당]] 입당 전력을 이유로 [[김창룡(군인)|김창룡]]이 주도한 숙군 작업으로 파면당한 후 [[백선엽]]의 도움을 받아 문관 신분으로 직제에도 없던 정보국 상황실장 직을 맡고 있었다. 정보국으로 배치된 육사 8기생들에게 전투정보과장 [[이후락]]이 상황실장에게도 인사를 하라고 했는데 박정희는 현역 장교가 아니라는 자괴감이 들었는지 "나한테는 인사할 필요 없다"라며 자리를 피해 버렸지만, 이후 박정희와 육사 8기생들은 서로 죽이 맞아 어울려 다녔다. 일명 '''대한음주당'''이란 [[주당]]들 모임을 결성하여 틈만 나면 모여서 부어라 마셔라 하며 친목을 다질 정도였다나. 이것이 인연이 되어 박정희의 중매로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큰딸 [[박영옥]]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렇게 김종필은 박정희와 처삼촌-조카사위라는 인척 관계로 묶이게 되었고 이후 박정희는 김종필을 조카사위 입장에서 이름을 부르기보다는 거의 항상 '''[[임자]]'''라고 불렀다.[* 사실 박정희는 대부분의 측근들을 임자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이후 [[4.19 혁명]]으로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승만 정부]]가 무너지고 [[대한민국 제2공화국|장면 내각]]이 들어선 시절에, 김종필은 예비역 [[중령]]의 신분으로 [[5.16 군사정변]]의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60481|훗날 인터뷰에 따르면]] 쿠데타 실행을 김종필 자신이 계획해 먼저 박정희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쿠데타 성공 후 김종필은 군으로 복귀하여 [[육군]] [[준장]]으로 진급한 후 [[예편]]했다. 군사혁명위원회의 후신인 국가재건최고회의 기간 동안 박정희의 오른팔이자 실세로 자리잡았다. 정보기관의 설립을 강력히 주장하여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 부장을 지내며 훗날 주요 권력기관으로 부상하는 중앙정보부의 기틀을 다졌다. 의회정치에 부정적이었던 박정희와는 달리, 일본식 정치에 매료를 느낀 김종필은 중앙정보부장 시절 [[민주공화당]] 창당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4대 의혹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물러나고 잠시 [[일본]]으로 외유를 떠나게 된다. 이 때 남긴 표현이 그 유명한 '자의 반, 타의 반'이다. 이후 민정 이양이 결정되자 귀국하여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박정희가 [[3선 개헌]]을 추진하자 초기에는 반대하였으나, 설득과 압박에 눌려서 결국 찬성으로 전향하였다. 박정희가 3선 대통령이 된 후 [[대한민국 국무총리|국무총리]]로 임명되면서, 다음 차례에는 대통령이 되어보나 했는데...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단행해버렸다.''' 유신 이후에도 박정희에게 적극 협조하며 국무총리직을 장기간 유지했고, "통일, 외교, 국방, 중화학공업만 빼고 나머진 모두 임자가 알아서 하라"는 박정희의 신임으로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도 보기 드문 실세 총리로 역임했다. 물론 실세 총리라도 결국 절대권력자인 박정희 대통령 아래 서열인, 말 그대로 '[[만인지상|일인지하 만인지상]]'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1975년, '건강상의 이유로' 국무총리직을 사임한다.[* [[박영옥|박정희의 조카]]와 결혼을 한 조카사위인데도 감시받는 상황에서 당내 견제에도 시달려야 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하자 민주공화당 [[총재]]에 선출되고 [[김영삼]], [[김대중]]과 "빠른 시일내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합의하였다. 민주공화당에서는 유신헌법에 따른 후임 대통령 선거를 준비했지만, 김종필 본인이 직선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박지원(1942)|박지원]]은 [[김종필]]이 사석에서 박정희에 대해 한번도 좋은 평가를 내린 적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박정희 정권시절 36살에 중앙정보부장, 45살에 총리를 역임하며 최근거리에서 박정희를 보좌해왔지만, 박정희의 행태에 원한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고 평가한다. 특히 박정희가 박근혜와 최태민과의 관계를 중앙정보부에 조사하게 하여 많은 것을 알아냈지만, 박정희가 하도 못된 짓을 많이 하는 바람에 딸한테 약점이 잡혀 아무 소리도 못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https://news.joins.com/article/2274712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